[사설] 새벽 5시 팔마운동장, 84만의 인내가 끝났다
교육부 제출 시한 이틀 앞두고 청와대 앞 상경 궐기…이제 정부가 답할 차례다
김광기 발행인 겸 편집인 · 입력 2026.08.18 · 최종수정 2026.08.18 · 조회 6
2026년 8월 18일 새벽 5시, 팔마운동장에 버스가 섰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각에 시민들은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오전 9시, 청와대 앞에서 순천대 의과대학과 동부권 대학병원 설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역 국회의원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밀었다. 주민 60만 명의 서명부가 정부에 전달됐다. 이날 상경은 지금까지의 집회와 성격이 다르다. 그동안 동부권의 요구는 목포대와 순천대라는 두 대학을 향해 있었다. 이제 그 화살은 정부를 겨눈다. 대정부 투쟁으로의 전환이다. 우리는 이 전환이 오히려 늦었다고 본다.
협상 테이블이라는 이름의 알리바이
전남 국립의대 논의는 1년 반 넘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의대를 어디에 둘 것인가, 병원은 어디에 세울 것인가, 대학본부는 누가 가져갈 것인가. 두 대학은 서로 카드를 흔들었고, 지자체는 중재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치권 역시 일관된 입장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사이 정부에 낼 서류의 항목마다 '미정'이라는 두 글자가 채워졌다.
문제의 본질은 두 대학의 자존심만이 아니다. 정부가 '두 대학이 합의하면 주겠다'는 조건을 걸어둔 순간, 협상 테이블은 결론을 만드는 자리가 아니라 결론을 미루는 자리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합의가 안 되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구조다. 그러한 구조가 결과적으로 정부의 정책 설계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을, 정부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숫자는 이미 답을 말하고 있다
범시민추진위가 정부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동부권 인구는 약 84만 명이다. 중증응급의료 이용 건수는 8만2천여 건으로 서부권의 1.7배가 넘는다. 암 진료 이용자도 1.4배 많다. 여수국가산단과 광양제철소를 비롯한 대규모 산업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35만 명을 넘고, 업무상 사고를 당한 노동자는 1천8백 명을 넘는다. 이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해룡면 주민이 가장 잘 안다. 불과 아흐레 전, 해룡산단의 한 공장에서 폭발이 일어나 52명이 대피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라는 말에 언제까지 기대야 하는가. 산단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3만 명이 넘는 주민이 사는 신대지구가 있다. 그곳에서 중증환자가 발생하면 구급차는 광주로, 혹은 더 먼 곳으로 달려야 한다. 골든타임이라는 말이 지도 위에서 이미 무너져 있다. 의료 취약성을 이야기하려면 도서 지역의 거리만 재서는 안 된다. 위험물질을 다루는 공장이 밀집한 지역에서, 사고가 나면 곧바로 중증외상과 화상을 감당해야 하는 지역에서, 그 감당의 주체가 없다는 것 역시 명백한 의료 취약이다.
8월 20일 오후 6시, 그다음을 묻는다
교육부가 정한 추진계획서 제출 시한은 8월 20일 오후 6시다. 이틀 남았다. 단일 계획서를 내지 못하면 2030학년도 신설 정원은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 수십 년을 끌어온 전남 의대가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정부에 요구한다. 첫째, 두 대학의 합의만을 전제로 삼는 방식을 재검토하라. 합의가 불발됐을 때 그 대가를 지역민이 치르는 구조라면, 행정이 제 역할을 못한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둘째, 입지 판단의 기준을 공개하라. 무엇을 어떤 가중치로 보고 있는지 밝히지 않으면 어떤 결정이 나와도 승복은 어렵다. 셋째, 동부권과 서부권을 제로섬으로 몰아넣지 마라. 캠퍼스와 부속병원의 분리 설치를 포함해, 320만 통합특별시 전체의 의료 격차를 함께 푸는 설계가 가능한지 정부가 먼저 답해야 한다.
지역 이기주의라는 말에 대하여
이번 요구를 두고 지역 간 밥그릇 싸움으로 보는 시선이 있다. 동의하기 어렵다. 밥그릇 싸움은 나눠 가질 것이 있을 때 성립한다. 동부권에는 애초에 그릇이 없었다. 전남은 오랫동안 의과대학도, 대학병원도 없는 곳이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이기주의라 부른다면, 그 말은 이 지역이 수십 년간 감내해온 시간에 대한 모독이다. 동시에 우리는 동부권 내부에도 주문한다. 서부권을 이겨야 할 상대로만 규정하는 순간, 이 싸움은 또다시 대학 대 대학의 구도로 되돌아간다. 우리가 결국 겨눠야 할 것은 결정을 미뤄온 정부의 태도이지, 같은 결핍을 겪어온 이웃 지역이 아니다.
새벽 5시의 무게
새벽 5시에 집을 나선 사람들은 정치를 하러 간 것이 아니다. 아픈 가족을 태우고 두 시간을 달려본 사람들, 산단에서 일하는 자식을 둔 부모들, 신대지구에서 아이를 키우며 응급실까지의 거리를 세어본 사람들이다. 그 발걸음의 무게를 정부가 서류 한 장의 미비로 되돌려 보내서는 안 된다. 이제 공은 정부에 있다. 남은 시간은 이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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